2026-06-04

음녀와 바벨론

 

이 글은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 마지막 때의 조감도' 중 '각주 10. 음녀와 바벨론' 부분에 해당되는 본문이다.



1. 음녀와 바벨론은 하나 된 존재이다.

음녀와 큰 성 바벨론은 동일한 존재이다. 음녀의 이마에 큰 바벨론이라는 명칭이 명시적으로 쓰여 있는 이상의 장면과 천사에 의한 음녀의 설명은 다른 어떠한 해석의 가능성보다 최우선하는 '정의'가 된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계 17:5)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계 17:18)

위와 같은 명시적 구절로 음녀와 큰 성 바벨론은 동일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요한계시록 17장의 음녀와 18장의 바벨론은 단순한 평행을 넘어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대칭 구조를 이룬다.

외관
음녀: 자주색과 붉은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밈 (17:4)
바벨론: 세마포와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밈 (18:16)

음행의 동참자
음녀: 땅의 임금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함 (17:2)
바벨론: 만국이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셨고 땅의 왕들이 그와 음행함 (18:3)

순교자의 피
음녀: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17:6)
바벨론: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18:24)

즉, 음녀와 큰 성 바벨론은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서, 그 존재가 영적 간음을 행하는 영적, 종교적 측면이 음녀로 상징되고, 큰 성 바벨론은 그 존재의 정치적 통치와 경제적 지위, 더 나아가 지리적 정체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2. 간음은 혼약을 전제로 성립한다.

성경이 말하는 음행과 음녀의 원형적 본질은 하나님과 혼약 관계를 맺은 주체의 배신에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징적 수사는 언약이 없는 이방 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방의 우상숭배 등의 죄는 영적 기본 상태에 따른 죄일 뿐, 계약을 파기한 간통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이방 도시인 두로가 음녀라고 불린 사례(사 23) 정도가 존재하지만 두로가 이스라엘과 깊은 동맹을 맺고 성전의 건축에까지 조력했던 특수한 관계였다는 점은 오히려 이러한 논지를 뒷받침한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영적 음행과 간음의 죄에 대한 규탄은 언약에 의한 혼약자인 이스라엘에게 압도적으로 집중되어 있다.

구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서 떠나 우상숭배와 죄악을 향할 때 일관적으로 간음, 창기, 음녀 등의 상징으로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다. 구약의 다음 부분에는 그러한 양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부분을 캐치하지 못했던 독자들은 성경의 다음 부분들을 천천히 정독해 보기 바란다.

모세오경

이스라엘의 배교, 우상숭배를 음행으로 규정하는 원형  

출애굽기 34:15-16
레위기 17:7; 20:5-6
민수기 15:39; 25:1-3
신명기 31:16

역사서

사사기 2:17; 8:27, 33
역대기상 5:25
역대기하 21:11-13
 

선지서

토라와 역사서에서 '음행'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라는 죄를 범하는 '행위'와 이에 대한 율법적 경고 및 역사적 기록으로 주로 나타나는 반면, 선지서에 이르러서는 이 개념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파기한 이스라엘을 구체적인 인물로 의인화하는 '인격(음녀)'이자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학적 테마로 전면화된다.

호세아 1-10장

음녀 비유의 중심서 - 선지자 호세아의 혼인 자체가 이스라엘의 행음을 경고하기 위한 하나님의 명이었다.

에스겔 16장, 23장

에스겔은 가장 강렬하고 상세하게 음녀를 묘사하며, 16장이 기술하는 음녀의 상징적 이미지는 요한계시록의 음녀에 대한 묘사와 겹쳐진다.
23장에서는, 함께 행음하였던 이방 세력에게 멸망을 당하는 음녀가 제시된다. 이는 올라 탄 짐승과 열뿔에게 미움받고 멸망 당하는 요한계시록의 음녀의 운명에 대한 예표가 된다.

예레미야 2-3장

유다의 배신과 음행의 고발

예레미야 5:7-8; 13:27; 22:8-9(큰 성); 23:10-14; 31:32

이사야 1:21

명시적으로 음녀와 성읍이 동일시되고 있는 대표적 원형이다.

이사야 57:3-13 

구약 선지서는 기본적으로 메시아의 임함과 그에 따르는 심판의 비중이 큰 종말론적 성격을 띠며 그 내용 중 7 할 이상이 원근법적 다중적 성취나 모형론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짐승(단 7), 네 마리의 말(슥 6), 일곱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슥 4), 이마의 인(겔 9) 등 요한계시록을 구성하는 종말론적 상징 요소들은 그 개체별 기원을 추적해 보면 사실상 대부분이 구약 선지서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이스라엘에 대한 음녀로서의 상징이 압도적으로 선지서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즉, 구약 선지서에서 '이스라엘의 배도'를 가리키던 '음녀'라는 상징이 요한계시록에서 재등장할 때 그것을 '배도한 이스라엘'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3. 음녀 바벨론과 짐승은 마지막 때에 공존한다.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계 17:3)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의 머리 수와 뿔 수의 합은 각각 일곱과 열이다. 이는 다니엘의 네 짐승과 요한계시록의 일곱 머리 열 뿔의 한 짐승이 동일한 존재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음녀가 일곱 머리 열 뿔의 한 마리 짐승에 올라탔다는 것은 곧 음녀가 '다니엘의 네 짐승'을 탄 것과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따라서 네 짐승들과 음녀가 서로 같은 시공간적 범위 안에 존재해야 한다는 강한 맥락적 압력이 형성되며 이에 의해 수수께끼 같은 난제들이 발생한다.

이러한 난제 중 상당 부분은 다니엘의 네 짐승들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의해 발생된다. 즉, 네 짐승을 각각 다니엘 2장의 신상에 대응하는 과거의 네 제국(바벨론-로마)으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계시록의 짐승 역시 그에 따라 과거의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시록에서 그들을 올라탄 음녀는 필연적으로 과거의 존재가 되어야 하거나 모호하고 추상적인 알레고리적 존재로 해석하는 정도의 타협안 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

그러한 해석들은 해당 예언과 관련된 다른 중요 구절들과의 치명적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이는 실로 중대한 문제로, 예를 들어, 음녀를 예루살렘으로 보는 해석이 그 근거의 뛰어난 내적 정합성에도 불구하고 과거주의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원인 역시 일정 부분 다니엘의 네 짐승에 대한 기존의 해석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러한 종말론적 왜곡이 도출되는 가장 근본적인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지위를 지워버리고 로마서 11장을 정면으로 부정해 온 대체신학적 대전제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네 짐승에 관한 이전 글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네 짐승은 모두 마지막 때에 함께 공존할 존재들이다. (참조: 다니엘 7장, 네 짐승) 네 짐승의 종말론적 공존이라는 이 새로운 시각은, 음녀가 일곱 머리 열 뿔의 짐승을 타고 있다는 요한계시록 17장 3절의 묘사를 통해, 음녀 역시 마지막 시대에 짐승들과 함께 공존하는 존재라는 전혀 다른 그림을 도출해 낸다. 

이와 같이 다니엘의 네 짐승이 미래의 마지막 때에 공존할 이방의 세력들이라는 점을 수용한다면, 짐승과 열 뿔 역시―다니엘 본문 자체의 명시적 기술과 같이(단 7:24)―마지막 때에 음녀와 함께 존재할 왕들이 된다. 이로써 음녀와 짐승들의 시공간적 무대가 '미래의 종말'로 단일하게 일치되며, 과거주의와 미래주의의 대립 속에서 해결되지 못했던 짐승과 열 뿔이 음녀를 멸망시키고 불사르는 장면(계 17:16) 등의 난제 구절이 해소된다.

이상을 요약하고 음녀와 짐승의 시대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음녀가 짐승을 타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명확한 묘사와 같이, 요한계시록의 한 짐승(=다니엘의 네 짐승) 및 그들의 모든 부속 요소들과 계시록의 음녀 바벨론은 모두 미래의 한 시대에 공존할 존재들이다. 이 시대는 다니엘 2장의 신상의 발-열 발가락(열 뿔)의 부분에 대응한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다니엘이 직접 내린 명시적 해석과 같이, 철과 진흙, 즉 사람의 씨와 이종(異種)의 씨가 섞인 홍수 이전의 세상이 재현되어 있을 것이다. 다니엘의 마지막 70번째 이레 역시 이 시기에 속한다.

음녀는 '모든' 나라를 그 음행에 참여시키고 '모든' 민족에게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계 14:8; 18:3)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계 16:17, 19)

바벨론이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 시점은 대접 심판 중 마지막 '일곱 번째 대접'이 쏟아질 때이다. 일곱 대접의 심판은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절한 사람들에 대한 첫 번째 대접의 심판으로부터 시작되며(계 16:2), 일곱번 째 대접으로 인해 큰 성 바벨론은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게 된다. (계 16:17-19) 이로써 일곱 대접의 심판은 짐승의 표를 받는 일이 벌어지고 그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는 7년 대환난기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음녀가 만국을 음행으로 미혹하는 범지구적 활동과, 그 죄악이 극에 달해 쏟아지는 하나님의 심판(진노의 포도주 잔)이 바로 이 '짐승의 표'의 시기에 맞물려 있다는 점은, 음녀가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는 마지막 때의 존재라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 재림 시 집행되는 진노의 포도주 틀 심판의 대상인 '만국'이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인류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환난주의든 후환난이든 그리스도 재림 시의 첫째 부활에는 오직 성도와 의인들만이 참여하며, 악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의 부활은 천년왕국이 끝난 후 백보좌 심판 때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계 20:4-6) 따라서 19장의 심판은 역사 속의 모든 죽은 자들이 아니라, 대환난의 끝자락에서 적그리스도와 결탁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세대의 생존하는 만국'에 쏟아지는 종말 심판으로 국한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미 소멸한 로마 제국이나 다른 과거의 존재들은 그리스도 재림 시기의 만국을 오염시킬 수도, 그들과 함께 재림의 심판대에 설 수도 없다. 따라서 음녀와 바벨론을 로마와 같은 과거의 존재로 묶어두려는 과거주의나 역사주의적 해석은 이러한 예언적 구조에 의해 무력화된다. 

요한계시록 17장 18절의 구절 또한 음녀의 존재 시기에 관해서 단서를 제공한다.

또 네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계 17:18) 

앞서 논증한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 17-18장의 무대가 미래의 종말이라는 관점을 견지할 때, 이 구절은 여자가 마지막 때의 전 지구적 통치의 중심이라는 관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백보 양보하여 이를 미래주의적 시각에 기댄 해석이라 치부할지라도, 최소한 이 구절에 의해 '음녀 = 1세기의 예루살렘'이라는 과거주의적 해석만큼은 확실하게 부정된다. 당시의 예루살렘은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기는커녕, 로마 제국의 압제 아래 놓여 있던 철저한 '피지배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4. 왜 예루살렘인가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계 11:8) 

큰 성 바벨론의 정체를 밝히는 가장 결정적인 열쇠는 요한계시록이 텍스트 내부에서 스스로 내린 정의에 있다.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바벨론은 일관되게 '큰 성(πόλις μεγάλη)'으로 지칭되는데(14:8; 16:19; 18:10; 18:19), 이 성의 지리적 실체는 이미 11장 8절에서 명백하게 선포되었다. 바로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즉 예루살렘이다. 계시록 내부의 상징이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는 대전제를 수용한다면, 큰 성 바벨론은 예루살렘 외에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계 18:24)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 13)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는 바벨론의 정체성은 그녀의 또다른 큰 죄, '선지자들의 피'에 의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바벨론을 "선지자들과 성도들의 피가 발견된 곳"으로 고발하며,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며 그 책임소재지에 대한 정체를 확증하신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터인즉 (계 11:7)

두 증인이 삼년 반의 증거 사역을 마치고 짐승에게 죽임을 당할 장소도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곳이다. 선지자들의 피에 대한 음녀와 큰 성의 죄악은 마지막 때 두 증인의 죽음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또다시 증거될 것이며, 큰 성과 음녀의 정체는 그들이 죽임을 당할 장소에 의해 확증될 것이다. 즉, 구약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대언자들을 살해한 영적 배도의 피 값은 오직 예루살렘이라는 한 공간 속에서 누적되고 마침내 최종집행된다.

일부 해석들은 '바벨론'이라는 이방적 명칭에 매몰되어 이를 예루살렘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11장 8절의 본문은 이 성을 이미 '소돔'과 '애굽'이라는 영적 비유로 부르고 있다. 구약 선지서 역시 배도한 예루살렘을 향해 거침없이 '소돔의 관원들'이라 부르며 그 부패함이 소돔보다 심하다고 고발한 선례가 있다.

"소돔과 애굽은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라는 11장 8절의 기술에서 어느 부분을 은유로, 어느 부분을 지리적 사실에 대한 진술로 취해야 할지를 스스로 상식적으로 판단해보라. '바벨론'이라는 이름은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는 사실적 기술의 무게를 결코 감당할 수 없음이 자명해진다. 결국, 영적 음행으로 타락한 예루살렘에게 거룩한 본래 이름 대신, 그 부패한 성질에 걸맞은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사 1:10) 

네 형은 그 딸들과 함께 네 좌편에 거하는 사마리아요 네 아우는 그 딸들과 함께 네 우편에 거하는 소돔이라 네가 그들의 행위대로만 행치 아니하며 그 가증한 대로만 행치 아니하고 그것을 적게 여겨서 네 모든 행위가 그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우 소돔 곧 그와 그 딸들은 너와 네 딸들의 행위 같이 행치 아니하였느니라; 사마리아는 네 죄의 절반도 범치 아니하였느니라 네가 그들보다 가증한 일을 심히 행한고로 너의 가증한 행위로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느니라 (겔 16:46-48, 51) 

상징체계: 짐승과 사람

이스라엘은 참 아담(사람), 이방은 사람을 대적하는 짐승이라는 상징 체계는 유대 묵시문학적 세계관에 있어서 일종의 확립된 공식이다. 선지자 아모스는 주의 날에 임할 이방의 위협을 예언하면서 그러한 구도를 가장 적나라하게 제시한다.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암 5:18-19)

이러한 묵시적 문법을 염두에 두고 요한계시록 17장을 바라보면 의미심장한 역방향의 추론이 가능해진다. 음녀가 올라탄 일곱 머리와 열 뿔의 괴물은 결국 이방 제국들의 총합인 '다니엘 7장의 짐승'이다. 그렇다면 그 짐승 위에 올라타 있는 여자는 유대 묵시문학의 오랜 공식에 따라 짐승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존재, 즉 사람(이스라엘) 계열의 정체성을 지녀야만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만약 이 존재가 이스라엘이 아닌 또 다른 이방의 권력이나 제국(로마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상징 체계는 결코 이 존재를 '여자'로 구별하여 독립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다니엘서가 그러했듯 짐승의 머리를 하나 더 추가하거나, 이리라든지 하는 적그리스도의 또 다른 '짐승'을 한 마리 더 등장시키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굳이 그 존재를 짐승의 부속물이 아닌, 짐승 위에 올라탄 독립된 '여자'로 묘사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이 존재가 이방 제국의 생태계(짐승)에 속하지 않는 전혀 다른 뿌리를 가진 존재, 곧 하나님과 혼약 관계를 맺었던 '배도한 이스라엘'임을 유대 묵시문학의 구조를 통해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음녀 외에 또 다른 한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12장

- 해와 달 그리고 열두 별이라는 요셉의 꿈으로 상징된 여자가 등장한다.
- 그녀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메시아를 낳는다.
-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붉은 용이 그녀를 쫓는다.
- 그녀는 용의 박해를 피해 삼 년 반 동안 예비된 장소로 도피한다.
- '그녀의 씨' 중에 남은 자손(the Remnant of her seed)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며, 이 시기는 때가 다한 용이 땅으로 내쫓긴 마지막 때이다.)

명백하게 이 여자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17장으로 넘어가 이 여인과 음녀를 비교해 보자.

요한계시록 17장

- 땅의 왕들과 더불어 음행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 그녀는 성전을 연상시키는 옷과 장신구로 자신을 꾸미고 이마에는 바벨론, 음녀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 그녀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붉은 짐승을 타고 있다.
- 그녀는 성도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 있다.
- 짐승은 그녀를 미워하여 결국 멸망시키고 불사른다. 

이처럼 12장과 17장은 강렬하게 병렬적이면서 동시에 대조적인 구조로 두 여자를 제시한다. 이 구조적 병렬은 두 여자가 이스라엘이라는 동일한 정체성의 뿌리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반면, 그 극단적인 대조는 참된 혼약자와 간음한 혼약자라는 영적 본성을 폭로한다. 즉, 이방 짐승 위에 올라탄 음녀는 이방과 간음하며 타락한 배도의 이스라엘(예루살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 속 이스라엘의 역사는 타락한 공동체 안에서 거룩한 씨가 끊임없이 체질되어지는 '분리의 역사'였다. 출애굽의 시작부터 이스라엘은 언약을 배반하는 간음의 무리와, 징계를 견디며 언약을 보존해 낸 '남은 자(Remnant)'의 분리를 통해 그 생명을 이어왔다. 마지막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이 전 지구적 배교의 중심(음녀)으로 타락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안에서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참된 자손(12장의 여자와 그녀의 씨 중 '남은 자들')을 반드시 체질하여 분리해 내신다. 12장과 17장은 바로 그 거대한 종말론적 분리의 극적인 대조표이다.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 (암 9:9-10) 

큰 성과 만국의 성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계 16:19)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심판의 대상이다. 이 구절은 세상의 모든 성이 무너진다는 식으로 뭉뚱그려 서술하지 않고, '큰 성'과 '민족들의 성'이 무너진다고 굳이 둘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민족들, 만국, nations 등으로 번역된 원문의 단어는 ἔθνος로, 이는 신약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이스라엘과 대조되는 이방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어의 goy(גּוֹי)/goyim(גּוֹיֵי)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단어인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이 구절이 멸망하는 모든 성들을 굳이 분리하여 제시하는 기준점은 이스라엘과 이방을 분리하는 '언약'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멸망의 한 축인 '민족들의 성'이 언약 밖의 이방 도성들을 의미한다면, 그와 대조를 이루는 '큰 성'은 마땅히 언약의 중심지인 이스라엘의 성, 예루살렘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마의 증거

이 패가 아론의 이마에 있어서 그로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출 28:38)

너는 또 그것들을 네 손에 매어 표적으로 삼고 네 눈 사이에 두어 이마의 표로 삼으며 (신 6:8)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겔 9:4)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계 7:3)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 13:16)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계 22:4)

성경에서의 이마는 단순한 신체 부위를 넘어, 한 존재의 정체성과 소속, 그리고 수치나 영광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영적인 표지판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예언적 언어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것은 예루살렘의 배교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고리라고 할 수 있다. 

이마에는 보석을, 귀에는 귀고리를, 머리에는 아름다운 관을 씌워 주었노라. (겔 16:12) 

에스겔 16장은 하나님께서 이마에 보석으로 치장해 주셨으나, 이후 행음함으로써 음녀가 되는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행음하는 그녀의 이마를 창녀의 이마로 칭한다. 

... 네가 네 행음과 네 사악함으로 그 땅을 더럽혔도다. 그러므로 소나기가 그치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네가 창녀의 이마를 가졌으므로 부끄러워하기를 거절하였도다. (렘 3:2-3)

요한계시록은 이에 더 나아가 더럽혀진 그녀의 이마의 모습을 최종적으로 폭로한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계 17:5) 

음녀의 의복: 성전의 언어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계 17:4)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계 18:16) 

이와 같은 음녀에 대한 묘사의 선지서의 원형은 간음하는 예루살렘에 대한 다음 구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네가 금과 은으로 단장하고 고운 아마포와 비단과 수놓은 것으로 옷 입으며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으므로 심히 아름답고 형통하여 한 왕국이 되었느니라 (겔 16:13)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찌라도 너의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렘 4:30)

성전이 존재하던 시기의 유대인에게 '자주색', '붉은색', '세마포'라는 조합은 즉각적으로 성전을 연상시키는 성전의 언어였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에 대해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를 하면서 성전의 휘장을 청색, '세마포', '주홍색', '자주색' 실로 수놓은 '바벨론식' 커튼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그의 기록에 따르면 예루살렘 포위 공격 이후 성전의 제사장이 거룩한 의복들을 티투스에게 넘겨주었는데, 여기에는 휘장 용도로 보관되어 있던 엄청난 양의 자주색 및 주홍색 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요한계시록의 묘사는 성전이 존재하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로마와 같은 이방 도시의 풍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가 자리 잡고 있던 바로 그 성읍을 향한 구체적인 고발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성전 건물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안쪽 부분은 바깥쪽에서 보이는 것보다 낮았으며, 높이 55규빗, 너비 16규빗의 금문(金門)들이 달려 있었다. 이 문들 앞에는 문과 같은 크기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청색 실과 세마포주홍색* 실과 자주색 실로 수놓은 참으로 경이로운 짜임새의 바벨론식 휘장이었다. 이러한 색상들의 혼합은 신비로운 해석을 담고 있었으니, 곧 우주의 일종의 상징이었다. . . . 또한 가슴에 의복을 동여매는 그 띠는 금 실과 자주색 실과 주홍색 실, 그리고 세마포와 청색 실로 이루어진 다섯 줄의 다양한 색상으로 수놓아져 있었는데, 이 색상들은 앞서 우리가 성전의 휘장을 수놓았다고 언급했던 바로 그 색들이었다. . . . 이 단추들 안에는 매우 크고 훌륭한 두 개의 호마노가 박혀 있었고, 그 위에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열두 개의 보석이 한 줄에 세 개씩 네 줄로 매달려 있었으니, 곧 홍보석, 황옥, 녹주석과 석류석, 벽옥, 남보석과 호박, 자수정, 백마노와 녹보석, 호마노, 창옥이었다. 이 보석들 각각의 위에도 앞서 언급한 지파들의 이름이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 . . 그리고 성소의 벽에서 성소에 있던 것과 같은 두 개의 등잔대와 상, 대접, 대접들을 인도해 주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져 매우 무거웠다. 그는 또한 거룩한 예배에 사용되던 보석들 및 수많은 다른 귀한 기물들과 함께 휘장들과 의복들도 티투스에게 넘겨주었다. 피네하스라는 이름의 성전 회계 담당자도 체포되었는데, 그는 제사장들의 속옷과 띠들을 티투스에게 보여주었으며, 휘장 용도로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엄청난 양의 자주색주홍색 실도 보여주었다. 아울러 계피와 육계를 비롯해 날마다 하나님께 분향하기 위해 함께 섞어 바치던 수많은 다른 향품들도 보여주었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제5, 6권)

 * 요한계시록의 음녀, 바벨론의 옷 색상과 유대 전쟁사 본문의 성전 휘장 색은 헬라어 원문상 'κόκκινος'로 동일한 색상이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를 'scarlet(주홍색)'으로 번역하여 통일성이 유지되고 있으나, 한국어 성경에서는 해당 구절에서 이 색상이 '붉은색'으로 번역된 경우가 많다.




외면당한 정체성

음녀와 바벨론에 대한 예언은 마지막 때, 7년 대환난 시기에 초점이 맞춰진 예언이다. 이는 다니엘의 마지막 이레로, 구약에서 감추어졌던 이방의 시대가 마감하고 예언의 역사는 다시 이스라엘을 주인공으로 하여 돌아갈 시대이다.

혼외의 정사인 "간음"이라는 개념은 원래부터 혼약의 대상이 아닌 이방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며, 환난기의 시점에서 은혜로써 신부가 된 이방은 이미 떠난 상태이다. 이러한 시대 조건과 자격 조건을 따른다면 그 간음의 주체를 교회나 이방으로 보는 해석은 설 자리가 없다. 정결해야 할 혼약자가 간음을 한다는 관념은 당연히 교회나 이방이 아닌 이스라엘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음녀를 배도한 예루살렘이라고 보는 기존의 견해들은 대부분 메시아를 거부하고 박해한 1세기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는 과거주의적 관점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주의는 요한계시록 자체가 증거하는 미래의 종말론적 타임라인과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을 앞서 논증하였다. 

또한, 성경이 묘사하는 바벨론의 영향력은 마지막 세대의 모든 민족과 땅의 왕들을 지배하는 범지구적 범위를 지닌다. (계 14:8; 17:18; 18:3) 따라서 음녀와 바벨론에 대한 예언을 미래의 사건으로 직시한다면, 마지막 세대에 등장할 전 지구적 정치-종교 통합 체제와 그것을 영적으로 리드하는 중심지는 필연적으로 '현실적 실체'로 요구될 수밖에 없다.

이 거대한 세계 통합 체제의 중심에 바로 마지막 때의 예루살렘이 위치한다. 이스라엘은 마지막 때 예루살렘에 스스로 성전을 세우고 제사를 재개(단 9:27)할 것이고, 그곳에서 스스로 하나님이라 주장할 적그리스도(살후 2:4)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가 메시아로서 통치하는 예루살렘은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정치적, 종교적 세계 통합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마지막 때에 관한 이런 이미지는 비교적 널리 인식되어 있다. 유대교 전통 또한 메시아 시대에는 전 세계 모든 민족이 메시아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는 영적, 정치적 비전을 공유하고 있으며, 적그리스도가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결코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수용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구도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자를 메시아로서 받아들여 만국의 종교 및 정치적 중심이 될 예루살렘이야말로 요한계시록이 경고한 음녀와 큰 성 바벨론의 유일한 해답일 수밖에 없다. (계 17:18) 다니엘의 마지막 이레의 언약, 적그리스도, 성전,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이어지는 세대주의-미래주의적 종말론의 기초적인 틀이 잡혀 있다면, 요한계시록의 음녀와 바벨론의 구절을 읽을 때 별도의 복잡한 논증을 거치지 않더라도 구조적 직관에 의해 즉각 도출되어야 마땅할 가장 강력한 대상이 바로 예루살렘인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이스라엘이 다시 예언의 주역이 된다는 종말론적 관을 비교적 확고하게 공유하는 진영에서조차, 그 예언의 가장 핵심적 존재인 음녀 바벨론의 정체로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언급조차 극도로 기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언뜻 기이하기까지 한 현상으로, 마지막 때 이스라엘의 주인공 됨은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배도라는 성경적 경고는 일관되게 외면하는 '종말론적 편향성 실명(失明)' 현상으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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