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 마지막 때의 조감도' 중 각주 '13.1. 다니엘 7장, 네 짐승' 부분에 해당되는 본문이다.
1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2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7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네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8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다니엘서 7장 1-8절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의 예언은 다니엘서 2장의 신상의 예언과 동일한 내용에 대한 병렬적 예언으로 주로 해석된다.
즉 사자는 신상의 순금 머리, 곰은 은 가슴, 표범은 놋 배와 넓적다리, 그리고 열 뿔의 짐승은 철 종아리인 로마라고 보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실제로 각 역사적 제국들의 특징 및 성격이 그에 대응하는 동물의 상징적 이미지와 절묘하게 부합한다는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알렉산더 사후 네 장군에 의해 분할된 그리스의 역사가 표범의 네 머리, 네 날개와 딱 떨어지게 일치하고, 문화적 세련미 보다는 압도적인 군사-행정력으로 철권통치를 구현한 로마의 특성이 마지막 짐승의 강한 이미지와 매우 잘 어울린다. 7장 본문에서 각 동물이 제시되는 순서가 그에 대응하는 제국들의 역사적 등장 순서와도 일치하는 점도 이 해석이 주류설로 자리잡는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다니엘서의 예언들에는 내적 완결성이 관찰된다. 2장의 느부갓네살 왕이 본 신상의 사례와 같이 다니엘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영감으로 예언적 꿈을 직접 해석하거나, 8장에서 천사가 수양과 수염소의 의미를 직접 풀이해 주는 것처럼 해석의 확장을 강력하게 제한하는 것이다. 제7장의 네 짐승에 대한 예언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가 내게 고하여 그 일의 해석을 알게 하여 가로되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다니엘서 7:16-18)
이처럼 천사가 직접 해석을 내리면서 다른 해석의 여지를 강력히 차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본문이 정한 이 해석은, 이 네 짐승이 세상에 "일어날 것"으로, 미래의 일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서두의 1절을 보면, 이 네 짐승의 이상과 그 해석이 주어진 시점은 바벨론 벨사살 왕 원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바벨론을 사자로 보는 해석은,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짐승이라는 천사의 해석과 명백히 배치된다. 사자인 바벨론은 예언의 시점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벨사살 원년은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반란을 시작한 시점으로, 그는 14년 후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주인공이 된다. 그러므로 고레스의 페르시아(곰) 역시 예언의 시점에서는 천사의 서술처럼 이미 앞으로 일어날 짐승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이 시기는 그리스(표범)도 폴리스 체제의 기틀을 다진 상태였고, 로마(열 뿔의 짐승) 또한 초기 공화정의 기틀을 마련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지점이었다.
이와 같은 식으로 보면, 이 해석은 천사가 직접 부여한 본문의 해석과 부합하는 지점이 전혀 없이 어긋나 있다. 하지만 주류 해석은 짐승들의 등장 시점을 '각 짐승이 제국의 면모를 갖추고 예루살렘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시점'이라고 전제하며 그 괴리를 메우려 한다. 백번 양보하여 그러한 관점을 수용하더라도, 예언과 해석이 주어진 시점이 이미 바벨론 제국의 말기였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짐승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바벨론 만큼은 다수의 다른 짐승에 대한 표현을 위해 희생된 것이라는 억지스런 합리화 정도 밖에 해결책이 남지 않는다. 말씀과 예언을 대함에 있어서 이러한 태도는 과연 옳은 것인가?
결국, 네 짐승을 바벨론과 그 뒤를 잇는 역사적 제국들로 보는 전통적 해석은, 본문 자체가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천사의 해석과 문자적으로 정면충돌을 일으키고 있음을 어떻게 해도 부인할 수 없다.
7절의 넷째 짐승에 대한 구절을 살펴보자.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네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7절)
넷째 짐승이 "전의" 모든 짐승 곧 사자(바벨론), 곰(페르시아), 표범(그리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의 국가라는 것이 이 구절에 대한 전통적 해석이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철권통치를 앞세운 로마가 피정복지들을 하나의 표준화된 체제로 통합하며 이전의 제국들과는 확연히 다른 통치 양식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라는 부분에 주목해 보자. 전통적 해석은, "전(前)의(before)"라는 어휘를 이 짐승이 '이전'의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와는 다르다는 시간적 의미로 읽고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언어에서 '전(前, before)'이라는 어휘에는 시간적 '앞'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공간상의 '앞'이라는 의미도 공존하며, 그 의미의 진화와 확장은 기본적으로 공간적 앞이라는 의미에서 시간적 앞의 의미로 진행된다. 이 '전(前)'이 해당 구절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 속 실제 용례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 단어의 아람어 원문은 qŏḏām으로, 기본적으로 "앞 (before, in front of)"의 의미를 갖는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용례를 살펴보자.
너희의 올린 글을 내 "앞에서" 낭독시키고
The letter which ye sent unto us hath been plainly read "before" me. (스 4:18)
아닥사스다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Now when the copy of king Artaxerxes' letter was read "before" Rehum... (스 4:23)
네게 준 기명은 예루살렘 하나님 "앞에" 드리고
those deliver thou "before" the God of Jerusalem. (스 7:19)
이는 너희가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내 "앞에서" 꾸며 말하여
for ye have prepared lying and corrupt words to speak "before" me (단 2:9)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there is none other that can shew it "before" the king (단 2:11)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 이에 아리옥이 다니엘을 데리고 급히 왕의 "앞에" 들어가서 고하되
bring me in "before" the king ... Then Arioch brought in Daniel "before" the king (단 2:24-25)
위와 같은 전형적 용례들을 통해 "전(前)"의 원어인 qŏḏām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이상의 구절 외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는 구절을 전부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단 2:10; 27, 36; 단 3:13; 단 4:2(1), 6, 7, 8; 단 5:13, 15, 17, 19, 23; 단 6:1(1), 10, 11, 12, 13, 18, 22, 26(1); 단 7:8(2), 10, 13, 20(2)
(1) 단 4:2와 단6:1 등의 구절에서 "즐겨 하노라(내 앞에서 좋다)"는 표현은 아람어 관용구 '샤파르 코담(šāp̄ar qŏḏām)'의 번역이다. 이는 추상적인 감정 상태가 아니라, 어떤 대상이 관찰자의 가시적 공간 안에 놓였을 때 내리는 공간적/관계적 판정을 의미한다. 한국어/영어 번역으로는 주관적 심리 묘사처럼 읽히기 쉬우나, 원문은 내 "면전(qŏḏām)에 내어놓기에 좋다, 합당하다(šāp̄ar)"는 지극히 공간적인 대면을 전제로 한다. 이는 qŏḏām이 일관되게 '실재하는 공간적 마주침'을 지시하고 있음을 뒷받침한다.
스 7:14; 단 2:6, 15, 18; 단 5:24
스 7:14 이하 다섯 구절들의 사례에서, qŏḏām은 영어의 'of/from'과 유사하게 해석되나, 이 역시 본질적으로는 '공간적 면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왕에 의해 보냄을 받거나(스 7:14), 왕으로부터 상을 받고(단 2:6), 명령이 하달되는(단 2:15) 장면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다. 이는 단순히 추상적인 '출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어전(면전)으로부터 직접 발현된 권위"를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긍휼을 구하거나(단 2:18), 신령한 손가락이 나와 글자를 쓰는 장면(단 5:24)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하나님의 '현존(Presence)'으로부터 사건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해당 구절(단 7:7)의 "전(前)의"에 사용된 qŏḏām은 대부분 왕의 '앞' 또는 특정 대상의 공간적 면전, 즉 'in the presence of'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론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가 시간적 의미의 '이전(以前, before)'으로 사용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음을 알 수 있다.
해당 구절의 한국어 번역이 "이 짐승은 '그 앞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하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면, 시간적, 공간적 양쪽 의미로의 해석 가능성이 열려 있었겠지만, "전의" 또는 "전에 있었던"과 같은 번역으로는 어떻게 봐도 '시간적 이전'의 의미만으로 한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7장 7절의 '전(前)'을 단순히 역사적/시간적 선후 관계(바벨론-페르시아-그리스-로마)로만 여기는 기존의 시각은, 그 문맥과 가장 가까운 바로 다음 구절, 8절(2)과 20절(2)의 구체적인 묘사 앞에서 그 타당성을 상실한다.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qŏḏām)"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다니엘서 7:8)
여기서 해당 환상의 장면을 '정지 화면'으로 가정해 보자.
만약 코담(qŏḏām)이 시간적 순서의 의미라면, 8절(2)의 "세 뿔이 작은 뿔 '(눈)앞에서' 뽑혔다"는 말은 "작은 뿔이 나오기 전(옛날)에 세 뿔이 이미 뽑혀 있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본문은 작은 뿔이 솟아오르면서 기존의 세 뿔을 밀어내는 동시적이고 물리적인 충돌과 상호작용을 묘사하고 있다. 이미 퇴장하여 사라진 뿔을 나중에 등장한 뿔이 물리적으로 뽑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이를 "면전(공간적 앞)"으로 읽으면 장면은 생생한 현장감을 얻는다(...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지극히 당연한 독해일 뿐이다). 작은 뿔이 솟아오를 때, 그 바로 눈앞에(면전에) 버티고 있던 세 뿔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실제적인 권력 투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20절은 더욱 결정적이다.
또 그것의 머리에는 열 뿔이 있고 그 외에 또 다른 뿔이 나오매 세 뿔이 그 "앞에(qŏḏām)" 빠졌으며 그 뿔에는 눈도 있고 큰 말하는 입도 있고 그 모양이 동류보다 강하여 보인 것이라 (다니엘서 7:20)
환상을 직접 풀이해 주는 천사 역시 동일한 단어(qŏḏām)를 사용하여 세 뿔이 빠지는 사건을 설명한다. 계시의 직접적 해석자인 천사가 사용한 어휘는 가장 명확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 여기서의 '앞'이 뿔과 뿔이 맞부딪히는 "공간적 대면"을 의미함이 명백하다면, 바로 한 구절 앞 7절의 "전(qo˘ḏaˉm)의 모든 짐승" 역시 "앞선 세 짐승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해석이다.
이처럼 "전(前, qŏḏām)"이 철저하게 '공간적 마주침'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본문 7장 12절에 의해 결정적 확증을 얻는다.
그 남은 모든 짐승은 그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7:12)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생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여야 한다. 그러나 말씀은 넷째 짐승이 심판을 받는 시점에도 앞선 세 짐승의 "생명이 보존되어 있다"고 명시한다. 이는 네 짐승이 시간적으로 단절된 제국들이 아니라, 넷째 짐승의 치세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실체(생명)를 유지하며 공간적으로 실존하고 있음을 확증하는 결정적 증거이다.
이상과 같이 단어의 용례를 확인하여 원래의 의미를 분명히 한 후 7절과 17절을 다시 들여다보면, 결국 이 네 짐승은 모두 시대적으로 공존'할' 존재들임이 보인다. 네 짐승은 '바벨론-로마'의 연대기가 아니며, 예언의 시점에 있어 모든 짐승들이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미래의 존재들이라는 천사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해석이 옳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과거의 로마는 이미 사라진 페르시아, 바벨론과 공간적으로 공존할 수 없으며, 로마가 그들을 발로 밟는다는 독해는 더더욱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이 과거의 제국들이라는 해석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제국 해석의 예언적 가치까지 포기되는 것은 아니다. 바벨론으로부터 로마로 이어지는 인류사의 예언적 큰 틀은 여전히 유효하며, 2장의 신상 이미지 위에 놓인 다니엘의 절대적 해석으로 고스란히 살아 있다. 다만 7장은 7장대로 본문 자체로 주어지는 천사의 해석을 문자적 충돌 없이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명백한 문자적 지시와 어긋나는 점을 사소하게 여겨 무시한 채, 7장의 예언을 이미 증명된 역사인 2장에 편하고 보기좋게 연결하여 동일시하는 순간, 마지막 때를 위해 남겨진 예언의 큰 조각 하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요한계시록 13:1-2)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이 다니엘 7장의 짐승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지배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기존 통설은 표범, 곰, 사자라는 이미 멸망한 과거 제국들의 속성이 종말의 적그리스도 체제에 응집된 것으로 보았다. 네 짐승(표범, 곰, 사자)의 특징이 "한 짐승"으로부터 나타나는 듯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의 역사는 미래의 예표가 된다는 그런 기제이다.
그러나 앞서의 고찰로써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은 마지막 때에 동시대적으로 공존할 독자적 세력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네 짐승과, 계시록의 네 짐승의 모습이 나타나는 한 짐승은 같은 대상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올바르게 해석한다면, 요한계시록의 묘사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선명한 예언적 이정표가 된다. 즉, 계시록의 짐승은 오래 전 죽어버린 네 제국들의 유산을 물려받거나 그들의 특성이 투영된 정신적인 후계자 같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는 세 짐승으로부터 권세를 빼앗아 그들을 발아래 두는 압도적인 통합 주체가 된다는 그림이 그려진다.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계 17:3, 16)
음녀가 일곱 머리(사자1+곰1+표범4+넷째1)와 열 뿔의 짐승을 "타고 있는" 장면과 그 짐승과 열 뿔이 음녀를 미워하고 배신하여 결국 불에 사르고 파멸시키는 결과를 보여주는 이런 구절들은 기존의 해석 입장에서 여러 '-주의'의 조합 수에 필적하는 많은 난제들을 생산해왔다. 쉽게 말해서, "어떻게 해서 음녀가 오래 전 멸망한 과거의 제국들에 올라타고 있을 수 있는가?"라든지, "죽어 없어진 그들이 어떻게 음녀를 물리적으로 불살라 멸망시키는가?", 혹은 "로마제국이어야 할 음녀가 어떻게 로마제국이라는 짐승을 타고 있는 그림이 그려지는가?" 하는 의문에 납득할 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 구절과 상징 요소들이 영적이고 추상적인 알레고리라고 치부해버리는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해석이 흐르게 된다. 이러한 난제들은, 넷이면서 하나인 다니엘 7장의 짐승과 음녀를 모두 미래의 존재로 고정하는 순간 해결된다.
정리해보겠다. 다니엘 7장의 사자와 곰, 표범은 마지막 때 세상 정세에 막강한 영향력("네 '큰' 짐승", 단 7:17)을 미치는 독자적 주요 국가 세력이다. 그러나 이들이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의 짐승처럼 묘사된 것과 같이, 넷째 짐승(적그리스도 체제)의 압도적인 권세에 짓밟혀 범지구적 체제 속으로 통합된다. 하지만 다니엘 7장에서 그 형태가 여전히 구분되어 나타남 같이, 통합된 체제 안에서도 해당 국가 세력이 고유의 특성과 기능적 실체를 유지한 채 존속하게 된다. 이것이 다니엘 7장을 말씀대로 올바르게 해석하고 요한계시록과 조화시킨 올바른 그림의 내용이다.이런 류의 맥락에서 등장하는 '짐승'은 언제나 이스라엘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영향(주로 해악)을 미치는 이방 민족, 국가 혹은 왕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맥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짐승과는 대조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구약 선지서의 '주의 날' 예언에 등장하는 짐승 역시 그러한 방향으로의 해석적 구조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들 짐승은 모두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상대로 뭔가를 저지르는 존재들이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아모스 5:18-19)
명시적으로 '주의 날'에 대한 예언임을 표명하는 아모스의 구절은, 이스라엘이 사자와 곰, 뱀(열 뿔의 마지막 짐승)으로 상징되는 짐승 국가들에 의해 봉변을 당하게 됨을 보여준다. 이 구절은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을 역사 속이 아닌 마지막 때에 공존하는 세력으로 보는 해석에 더욱 무게를 실어준다.
사람이 집에 들어간다는 부분에서는 아무래도 거짓 메시아의 주제와 연관된 유대인들의 귀환 운동이 연상된다. (참조: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 마지막 때의 조감도', 각주 8. 2.2))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을 먼 과거에 사그라든 제국으로 보는 전통적 시각에서 벗어나, 문자적으로 올바른 해석으로 재정립한다면, 이처럼 마지막 때를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묘사하는 그림까지도 도출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 성경 예언은 '성취를 통한 증거'의 원리로 이루어진다. 예언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 인간이 그 진행을 완벽히 예측하도록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날 때 혹은 그 직후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되었음을 확증하여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요 14:29) 즉, 때가 이르기 전에 성급하게 현재의 사건이나 흐름을 예언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열 뿔의 마지막 짐승은 유럽연합(EU)이다", "교황이 적그리스도다, 거짓선지자다", "로마가 음녀다, 미국이 바벨론이다", "오바마는 적그리스도다, 트럼프다", "곡과 마곡의 전쟁이다" 하는 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끼워넣기식 예언 해석에 실패해왔다.
다니엘 2장이 명확히 제시하는 열 발가락(열 뿔)의 때에 대한 묘사는 움직일 수 없는 굳건한 예언적 기준이 된다. 그 세상은 철과 진흙, 즉 사람의 씨와 이종의 씨가 어우러지는 현재의 상식을 초월한 세계로서, 역시 상식을 넘는 대격변을 통해 기존 질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을 세상일 것이다.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의한 섣부른 예측 행위 보다는, 어떤 예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시기와 대상이 무엇인지 하는 그 틀만큼이 정확히 정립되어 있다면, 때가 되어 예언이 상기될 때 그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며, 그 성취를 보는 자는 자신이 말씀이 가리키는 때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자가 어느 국가를 가리키는지, 표범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까지 함부로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은" 사자 형상의 짐승에 대한 묘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만큼은 짚고 마치고자 한다. 앞서의 언급과 같이 짐승이 이방 민족과 국가로 제시되는 예언적 맥락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사람'으로 상징되는 구조는 비교적 명확히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해당 구절은 사자로 상징되는 이방 국가가 스스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투사, 사칭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는 특정 국가가 스스로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지파'의 후예라 자처하거나, 자국 왕실이 다윗의 보좌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유대적 전통(할례 등)을 수용하는 등의 행적을 보인 사례가 존재한다. 이는 예언 속 사자가 단순히 강력한 국가를 넘어, 기만적인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정통성이나 상속권 등을 주장하며 마지막 때에 등장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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